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공화국 (문단 편집) === 총재정부와 제3차 연립정부 === 9월 1일에(9월 14일) 케렌스키는 정식 정부를 수립한다. 동시에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그러나 러시아 상원의 반대로 법령으로 확정되지는 못했다] 외무장관 미하일 테레셴코, 육군장관 알렉산드르 베르홉스키(Александр Верховский), 해군장관 드미트리 베르데렙스키(Дмитрий Вердеревский), 우편전신장관 알렉세이 니키틴(Алексей Никитин)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주석(직위)|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케렌스키가 당원으로 있던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은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당의 방침과 달리 공화국을 선포한 데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 양보를 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 내의 정치투쟁 중지 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케렌스키의 소속 정당이다.]과 [[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입헌민주당]]이 참가하는 3차 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또한 부르주아와 지주의 조직인 젬스트보와 시 두마의 대표권을 늘리고 공장 위원회, 군 위원회, 노동조합의 의석수를 삭감했다. 9월 25일(10월 8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다시 입헌민주당과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민중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고 민중들은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10월 말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파를 억눌렀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다. 케렌스키는 이에 대해 10월 23일(11월 5일) 사관학교 생도들을 동원해 볼셰비키 기관지 인쇄소를 습격했으나 트로츠키가 대비를 해두어 실패했고, 이를 기회로 10월 24일(11월 6일) 볼셰비키와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제히 봉기한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25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다. 10월 26일(11월 8일) 새벽 2시에는 러시아 공화국 정부청사로 쓰고 있던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고 러시아 공화국은 무너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